[기자수첩] KAI 방산비리 수사 장기화…소탐대실하지 않길

  • 송고 2017.09.05 10:56
  • 수정 2017.09.05 10:58
  • 이형선 기자 (leehy302@e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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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저질렀다면 처벌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일개 직원들까지 무턱대고 다 소환해 조사하면서 직원들이 손을 놓고 있어요. 협력업체들까지 줄도산 위기에 처했습니다. 항공산업은 살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좀 살려주세요."

지난달 25일 국회에서 만난 류재선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노조위원장의 목소리에서는 답답함이 묻어났다. 이날 노조는 검찰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경영위기에 내몰린 회사를 구하기 위해 직접 언론을 상대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노조 측은 기자회견문 낭독에 앞서 "KAI의 방산비리와 분식회계 수사로 인한 국민 여러분의 따가운 질책에 대해 깊이 사죄드린다"며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대표 발언을 맡은 류 노조위원장은 작심한 듯 담담하고도 차분한 어조로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방산비리 의혹에 대한 엄정수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데에는 공감하지만 비리 수사에 정치적 의도가 있어선 안된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그는 "항공산업을 살려야 한다. 정부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해결해달라"며 강하게 촉구했다.

실제로 현재 국내 최대 방산업체인 KAI는 '방산비리 의혹'이라는 오명을 쓴 채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올 초 하성용 전 사장의 비자금 조성 등 경영진 비리로부터 촉발된 수사가 원가 부풀리기와 분식회계, 그리고 협력업체 비리 수사로까지 이어지면서 KAI와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 전 방위적인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검찰 수사는 두달여 가까이, 금감원의 분식회계 수사는 석달째에 접어들고 있다.

하지만 비리 의혹을 밝혀낼 핵심적인 '스모킹 건(결정적 단서)'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장기화국면에 접어든 검찰 수사로 인해 곳곳에서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우선 이번 수사로 KAI가 진행 중인 사업에 일정부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회사의 명운이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 공군 고등훈련기 교체사업(Advanced Pilot Training·APT)을 비롯해 항공정비(MRO) 사업자 지정, 수리온(한국형 헬기)의 해외수출 등 굵직한 프로젝트들이 모두 답보상태에 놓이게 됐다.

특히 APT사업 규모는 17조원에 이르지만 이로 인한 직간접적인 파급 효과는 약 1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단순히 KAI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오랜 기간 공을 들여왔던 사업이다. 항공산업 종사자들에게 KAI가 처한 지금의 상황이 더욱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덩달아 야심차게 진행해왔던 항공정비(MRO) 사업 유치 또한 요원해졌다. KAI의 본사가 있는 사천시는 항공산업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어 국토부가 추진 중인 MRO 사업자로의 지정이 유력했던 터다. 하지만 방산비리 의혹에 휩싸이면서 사업자 선정절차가 중단돼 버렸다.

국내 항공 MRO 시장 규모는 오는 2020년 4조25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돼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최근 들어 외국계 MRO 기업들까지 국내 시장 진출에 속도를 높이면서 머지않아 국내 시장을 잠식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몇 달 새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한 직간접적인 피해 규모는 단순히 수치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배경이다. 이를 바라보는 업계에서도 KAI를 발판 삼아 세계 항공시장에서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그동안의 노력들이 무위로 돌아갈 공산이 커졌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이번 기회로 방산비리가 척결돼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최근 검찰의 일련의 행보를 보면 자칫 이번 사태로 인해 결과적으로 소탐대실의 우(愚)를 범하게 되진 않을까하는 우려가 사라지지 않는다.

KAI는 국내 최대 방산기업이자 국내 유일의 완제기 제조업체다. '국내 유일의 항공기 회사'로서 국내 항공산업의 명맥을 이어오는 데에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KAI가 추진 중인 굵직한 국책사업들의 성공유무가 미래의 한국 국력을 좌우할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KAI의 위기가 곧 항공 산업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도 물론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무엇보다 최근 빈번한 북한의 핵 도발에 따라 국가 안보를 위한 항공우주 방위산업 육성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KAI의 존재가치가 더 부각되는 이유다.

새 정부의 첫 적폐청산 수사로 꼽힌 'KAI 방산 비리' 의혹에 대한 정확한 사실관계는 추후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국내 항공산업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KAI 시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부디 검찰이 당장 눈앞의 성과만을 보고 소탐대실하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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