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근성'이 지나치면 '곤조'가 된다

  • 송고 2021.08.20 10:19
  • 수정 2022.10.18 17:58
  • EBN 이윤형 기자 (ybro@e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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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형 금융증권부 기자

이윤형 금융증권부 기자

매사를 끝까지 해내는 억센 정신을 뜻하는 '근성(根性)'은 얼핏만 들어도 긍정적이다.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끈기 있게 견딘다는 일종의 스포츠맨십이 연상되기 때문일 터다.


훌륭한 정신력으로 평가하는 것과 달리, 같은 한자를 쓰면서도 발음이 다른 '곤조(こんじょう·根性)'는 다른 맥락이다.


보통 곤조는 질긴 정신력이라는 점에서 근성의 사전적 의미와 같지만, 바람직한 정신자세보다는 단지 의견을 고치지 않는, 개선할 줄 모르는 '고집'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더러운 성질'로도 쓰인다.


두 단어의 차이점은 한국식 발음이냐, 일본식 발음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실패 여부를 모르는 상태에서 던지는 도전이냐, 실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존 방식을 고수하는 무모함이냐라는 인지적 차원에서의 차이다. 흥미로운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뜨거운 도전의 근성이라도, 방법의 개선 없이 이어진다면 답 없는 곤조로 바꿔 불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만큼 인지적 행동수정은 중요하다.


수차례 겪은 부작용에도 매번 같은 정책을 내놓는 금융당국의 평가도 어느새 근성에서 곤조로 평가되고 있다. 종목은 가계대출이다. 당국은 올해 하반기도 어김없이 대출 증가세를 잡기 위해 금융권을 대상으로 대출 조이기를 주문하고 있다.


가계대출이 많이 늘어나기는 했다.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가계대출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전 금융권의 가계대출은 15조2000억원 증가해 전월 대비 5조원 가량 증가했다. 지난해 동기 대비 증가율은 무려 10% 수준이다. 당국의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 관리 목표치인 5~6%를 큰 폭으로 상회한 셈이다. 그래서 당국은 내년까지 대출 증가율을 4%대로 관리하겠다고 했다. 이미 상반기 8~9%를 기록한 만큼 하반기에는 3~4%대 수준으로 조이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가계대출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증가량을 줄이라는 정책은 얼핏 보면 당연하다. 실제로, 당국이 금융권에 대출 조이기를 주문하면 대출 증가량은 일시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도를 줄이고 금리를 올리거나 심사를 까다롭게 만들어 차주들이 대출을 받기 어려운 환경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출 증가율이 감소한 적은 있어도, 대출 수요가 감소한 적은 없다. 적어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가 이어지고 있는 최근에는 말이다. 당국의 요구로 금융사들이 대출 문턱을 높인다고 수요까지 꺼지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대출 문턱에 막힌 수요는 다른 금융사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대출 조건은 악화된다. 그리고 이는 흔히 말하는 '풍선효과'의 부작용이다.


대출 총량 규제는 수년째 경험해왔듯 부작용이 당연히 수반되는 정책이다. 당국이 '대출을 조인다'는 얘기가 나오자마자 2금융권의 대출도 급증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지난달 보험사와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서 가계대출은 5조6000억원 증가하며 전월 증가액 3조9000억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올 상반기 증가액만 21조7000억원 수준으로 지난해 2금융권 전체 가계대출 증가액도 반기 만에 넘어섰다. 본격적인 대출 조이기가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풍선효과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출을 더 많이 받기 위해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한 2금융권으로 대출자들이 몰리는 등의 풍선효과가 나타나는 배경이다. 이 때문에 당국은 대출 수요가 몰리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2금융권에 대출 한도 축소를 당부하는 등 추가 규제도 마련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이제 다음은 정부의 대출 규제 탓에 가계 채무상환능력이 양호한데도 과도하게 억눌려 피해를 보는 서민·중산층이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올 차례다. 그럼 당국은 '대출은 상환할 수 있는 만큼 받는 게 마땅하다'는 공자님 말씀을 내놓을 것도 뻔하다.


이미 비슷한 정책을 예고하기도 했다. 최근 금융감독원은 은행권에 마이너스 통장 등 신용대출의 개인 한도를 연소득 수준으로 낮춰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은행의 신용대출 한도는 연소득의 1.5∼2배 수준인데, 이를 연봉 수준(1배)으로 낮춰 과도한 신용대출을 줄이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대출 총량 규제 정책으로 주택 수요자들이 서울, 수도권에서 집을 살 때 대출을 조금이라도 받기 힘든 상황이 된 지도 오래됐다. 현금으로 집을 사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대출을 끼지 않고는 내 집을 마련하기 어려운 서민과 현금부자 사이에 또 다른 '자산 경계선'이 그어진 것이다. 대출은 돈 버는 만큼 받으라는 정부 규제가 만든 결과다.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논하면서도 뒤로는 '가진 만큼, 주제를 알고 살라는 것이냐'는 반문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대출을 틀어막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조언은 이미 나온지 오래다. "지금 같은 시기에 무조건 대출을 조일 경우 소득과 신용이 낮은 계층은 결국 비싼 이자를 내고 돈을 빌리는 악순환이 일어난다는" 지적도 입이 아프게 나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똑같은 질타가 이어지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다. 아직 정부는 늘어나는 가계대출 총량 그래프에만 몰두하고, 화살표를 꺾는 게 능사라며 곤조를 부리고 있다.


그렇기에 해묵은 지적은 또 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정부는 인지적 행동수정에 나서야한다. 대출을 줄이는 것은 마땅하지만 여기에서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된다. 그동안 대출규제와 함께 연착륙과 서민들을 위한 다양한 방책을 동시에 펼쳤다고 얘기하겠지만, 이번 고찰에서는 이것만 명심하면 된다. 현재까지 그런 병행 대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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